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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화백은 1913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대지주였고, 집안에 테니스장이 있을 정도로 부유한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형 이여성은 아버지의 돈을 훔쳐 독립운동가가 되었고, 약산 김원봉·여운형 선생의 오른팔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유명한 동아일보 기자였으며, 그 일로 해직되고 경찰서에서 고문과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쾌대 화백은 일본제국 미술대학에 유학하며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웠습니다.
결혼한 아내 유갑봉 여사를 무척 사랑해 자주 그림 속에 담았고, 해방 전부터 파격적인 작품으로 이미 크게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전쟁이 터지면서 만삭의 아내와 어린 자녀들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했고, 결국 인민군에 붙잡혀 스탈린 초상화 등을 그리는 강제 부역을 하게 됩니다.
이는 가족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러나 곧 국군에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오랜 기간 수용소 생활을 하다 북으로 송환됩니다.
그가 자진 월북을 한 것인지, 강제로 끌려간 것인지를 두고는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립니다.
특히 그는 가족 사랑이 각별해 수용소에서도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걱정하는 편지를 늘 보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그가 아무 말 없이 월북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14만 명이나 되는 포로가 있었고, 반강제 송환된 사례도 많아 좀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북으로 보내진 이쾌대 화백은 대지주의 아들이자 일본 명문대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북에서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고, 기록조차 거의 남지 않은 채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조차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이름조차 금기시되다가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조치 이후에야 비로소 작품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의 아내 유갑봉 여사는 반세기 넘게 남편을 기다리며 작품 한 장도 팔지 않고 지켜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이쾌대라는 이름을 다시 이야기하고 그의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쾌대 화백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려진 비운의 천재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를 새롭게 바라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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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in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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